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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는‘한일 우정의 해’를 계기로 시작된‘한일축제한마당’ 발기인 다카스기 노부야(高杉暢也, SJC 전 이사장・한국후지제록스 전 회장) 한일축제한마당 명예위원장 겸 실행위원이 기록・작성한 한일축제한마당의 발자취를 소개한다.

1. 프롤로그

‘한일축제한마당’은 2005년에 시작했습니다. 이 해는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는 ‘한일우정의 해’로 ‘한일축제한마당’은 그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일본 축제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적었기 때문에, 어떤 것에 흥미를 갖게 될지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준비를 진행했습니다. 또한, 독도 및 역사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정치적으로 흔들린 적도 있어서 “정말 괜찮을까”라는 걱정도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청명한 하늘 아래 진행된 대학로 행사장에는 5 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모여 한일 축제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특히 피날레를 장식한 ‘한일 제등 페스티벌’에 일본의 ‘아키타 간토(秋田竿燈)’, ‘야마가도로 오도리(山鹿灯篭踊り)’, ‘아오모리 네부타(青森ねぷた)’가, 그리고 한국의 ‘능인선원 석가상’이 화려하게 퍼레이드를 펼치자 대학로는 환호성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Seoul Japan Club(SJC) 멤버는, 매년‘한일축제한마당’을 지속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2005년은 기념의 해라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모든 지원을 받았지만, 앞으로 축제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자금을 모을지, 예산초과시의 책임 문제 등 여러 걱정이 앞서 모두가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국 연구가이자 철학자인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씨로부터‘한류’와‘룩 코리아(LOOK KOREA)’를 통해“한일 양국은 인터렉티브(상호작용) 관계를 구축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이데올로기의 한일관계’나 ‘반발 감정의 한일관계’가 아닌 ‘창조적 한일관계’로 전환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는 말이 전해져 왔습니다.


‘창조적 한일관계’로 이어가자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씨의 말에 자극을 받아, 과감하게 2006년도 대학로에서 ‘한일축제한마당’을 열게 되었습니다. 전년보다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관객들이 기뻐해주셨고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 장관(전 유엔 사무총장)께서 “한국도 일본에서 동일한 행사를 개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되자, 2007년도 당연히 개최하는 것이 되면서, 아무도 뒤로 물러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인 시청 앞 광장과 청계천에서 개최할 것을 서울시와 합의했습니다. 여기서 한일축제한마당을 하게 되었지만, 무슨 일이 있을 지는 미지수였습니다. 일본에 있는 관계자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의 마쓰리를 한다는 것은 리스크가 크고, 너무 위험하다,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는 의견을 강하게 내세웠고, 상당히 설득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멤버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심기일전해서 새로운 축제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한국어의 ‘섞기’, 즉 ‘비빔밥’을 컨셉트로 삼았고, 이 해에 기념 행사로 ‘조선통신사 400주년 기념’을 프로그램에 포함시켜서 개최했습니다.


‘한일축제한마당’의 특징

‘한일축제한마당’의 특징은 국가 간 교류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청소년 등 다양한 계층의 교류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일축제한마당’을 성공시키는 열쇠는 첫째 ‘자금’, 둘째 ‘자원봉사활동(노하우)’, 셋째 ‘마음’ 3가지입니다. ‘축제’도 사업이므로, 역시 자금의 뒷받침 없이는 개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SJC 회원 기업 및 한국 측 기업에 협찬에 대한 이해와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양국 정부 주도로 시작된 ‘한일축제한마당’은 이제 양국의 자원봉사자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를 거쳐 만들어 가는 ‘창조적인 축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세스가 쌓여 다양한 노하우가 축적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꿀 것은 바꾸되,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바꾸지 않는다”는 ‘불역유행(不易流行)’의 강인한 정신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한일축제한마당’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와 국경의 자유화가 가속화 되는 가운데 한일 양국은 민주주의, 시장경제주의 등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는 파트너입니다. 양국간에는 어떤 악천후가 있어도 항상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처럼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서 이 ‘한일축제한마당’을 키워서, 양국의 젊은 세대들이 이어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쓰리가 축제를 만날 때’

한국과 일본은 오랜 역사 속에서 교류를 키워 왔습니다. 그리고‘가깝고도 먼 나라’혹은‘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라’라고 합니다. 축제도 양국 문화의 흐름 속에서 오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축제한마당을 지속하면서, 양국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08년‘자 놀아보세- 다문화 이해를 위한 한일축제(김용운, 오구라 키조(小倉紀蔵)감수)’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양국의 저명인들이 전문 분야에서 견해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마쓰리를 둘러싼 한일 마음의 교류, 그 다중주체주의적 고찰 :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교토 대학원 준교수>
● 마쓰리, 경계를 넘어 : <히라이 도시하루(平井敏晴) 독일 문학자・비교 문화 학자>
●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는 마쓰리 : <박전렬 중앙대학 교수>
● 이문화(異文化), 이세계(異世界)의 창 : <가미야 니지(神谷丹路) 일본 대학・와코(和光) 대학 시간 강사>
●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 태어난‘한일축제한마당’: <정재정 서울시립대학 교수>
● 조선시대 축제의 다양한 모습 : <전경욱 고려대 교수>
● 축제를 둘러싼 대담 - 충돌을 넘어 포용의 시대로 :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국제 교류 기금 이사장・지명관 종교 철학자>
● 한국과 일본의 제사(祭祀)감각과 샤머니즘 :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 도쿄(東京)대학 객원 교수>
● 한일축제의 의의 : <김용운 한양대 명예 교수>
● 한일축제 –‘사슴 춤’이 있는 풍경 : <아카사카 노리오(赤坂憲雄) 도호쿠(東北)예술 공과 대학 원장>
● 민속축제문화와 현대한국사회 : <서연호 고려대 명예 교수>

이들 저명 인사의 식견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고, 또한 인터넷 등에서 참고 문헌을 추가하여 ‘한일축제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일축제한마당’의 의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 일본의 마쓰리

‘마쓰리’라는 말은‘마쓰루’(祀る:모시다, 제사 지내다)의 명사형

‘마쓰리(まつり)’라는 말은 '마쓰루’(まつる 모시다, 제사 지내다)의 명사형으로, 본래 신을 모시는 것, 또는 그 의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개인이 그러한 의식에 참가하는 것도 ‘마쓰리’이며, 현재에도 지진제(地鎮祭), 기원제(祈願祭) 등의 마쓰리가 그것에 해당됩니다. 일본은 고대에 제사를 담당하는 자와 정치를 관장 하는 자가 일치하는 제정일치체제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정(政:마쓰리고토まつりごと)이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제사 때는 신령(神霊)에게 제물이나 행위 등 다양한 것을 바치는 의식이 거행되어 그 규모가 큰 지역의 행사 전체를 가리켜 ‘마쓰리’라 불려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면서 제사를 동반한 북적거리고 흥겨운 행사에 대해서만 ‘마쓰리(祭)’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고, 원래 제사와 관계없이 행해지는 화려한 행사, 이벤트에 대해 ‘마쓰리(祭)’라 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쓰리(まつり)’나 ‘마쓰루(まつる)’라는 고어가 있고, 그 후 한자의 유입으로 ‘마쓰리(祭り:제사 및 축제)’・‘마쓰리(奉り:제사 및 봉양)’・‘마쓰리(祀り:제사 및 기원)’ ・‘마쓰리(政り: 제사 및 정치)’ ・‘마쓰리(纏り: 통합)’ 등이 이에 해당되는 말로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마쓰리’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양식화된 행위

본래‘마쓰리(まつり)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양식화된 행위입니다. 기원, 감사, 사죄, 숭배, 귀의, 복종의 의사를 전달하고 그 의의(意義)를 확인하기 위해 행해진 것입니다.(제사 단계) ‘마쓰리(まつり)’의 성장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단계가 있습니다. 제사는 연중행사(명절)나 통과 의례와 관련하여 정기적으로 열리는 것이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공동체 전체에 의해 행해지고 공동체 통합 의례로서 기능을 합니다. 이것이 제례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공동체가 붕괴되고 도시가 출현하면 도시민의 통합 의례로서의 기능을 강화하여 종교적 의미는 명분만 남게 되고 화려한 다시(山車: 축제 때 끄는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나 예능의 피로(披露)등 오락성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마쓰리’를 행하는 자와 감상하는 자로 나누어졌습니다. 이것이 제례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대중 통합으로서의 기능과 오락성을 더욱 추구한 결과, 원래의 종교적 의미는 망각되거나, 기능을 상실한 세속적인 행사로서의 ‘마쓰리’가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마쓰리(祭)

현재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마쓰리(祭)는 신사나 사원을 그 주체 또는 무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 목적과 의의는 첫째 ‘오곡 풍양 (五穀豊穣)’을 비롯해 ‘대어기원(大漁追福)’,‘사업번창(商売繁盛)’, ‘역병퇴치(疫病退散) ’, ‘무병무해(無病息災)’, ‘가내안전(家内安全)’, ‘무병장수(安寧長寿)’, ‘부부원만(夫婦円満)’,‘자손번영(子孫繁栄)’,‘조상 숭배(祖先崇拝)’,‘백성안민(豊楽万民)’,‘천하태평(天下泰平)’등 복을 기 원하거나 액막이 기원으로 행해지는 것. 둘째, 이러한 것들의 성취에 대한 감사로서 행해지는 것. 셋째, 각 절기 등의 연중 행사가 발전되어 행해지는 것. 넷째, 위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 등 다양합니다. 그 목적에 따라 개최 시기 및 행사 내용은 각양각색으로 다양합니다. 또한 같은 목적을 갖고 있거나 같은 제신(祭神)을 모시는 마쓰리라 해도 제사양식이나 취향 또는 전통 등이 지방 혹은 지역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쓰리(祭)의 목적이 시대 변화에 따라 참가자들의 이해와는 거리가 멀어진 경우도 많고, 행사 내용도 사회 환경의 변화 등에 의해 불가피하게 변경되기도 했습니다.


3. 한국의 축제


한민족의 계보

한민족의 계보는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1)양쯔강(揚子江) 하구지역에서 대륙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산동반도 부근에서 한반도에 유입된 부족
(2)대륙 동북 지방의 부여족(扶余族)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같은 몬순 지역에 있고 동일한 계절 감각을 공유하며 오랫동안 농업 중심 생활을 해왔습니다. 부족의 우두머리(首領) 또는 조상에 대한 의식(意識)은 한일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축으로, 일본에서는 (1)국가 권력이 주입 된 국가적인 것 (2)각 지방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분리되었지만, 한국에서는 (1)조상께 드리는 가문 중심의 제사와 (2)공동체의 신께 드리는 동신제(洞神祭)와 산신제(山神祭)로 분리되는 차이가 생겨났습니다.
즉, 양반의 유교적인 제사와 마을 사람들의 샤머니즘적인 마을 축제가 거의 분리되어 축제의 이중구조가 발생한 것입니다.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마을 축제의 이중 조직’(1933)>

따라서 한국에는 일본의 ‘마쓰리(祭り)’라는 의미의 고유어도 없기 때문에, ‘축제(祝祭)’라는 한자를 사용합니다.


한국 전통축제의 특성

한국 전통축제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개념으로 ‘두레’가 있습니다. 삼국 시대(AD200)를 맞기 이전의 삼한((마한,진한,변한)시대((BC100)에 농사의 시작과 끝에 행하던 음주가무가 ‘두레’의 원래 모습입니다. 그리고 ‘두레’를 정서적, 혹은 이념적으로 지원하고 전 주민의 결집을 촉구하던 상징적인 의식(儀式) 이 바로 ‘축제(祝祭)’였던 것입니다.

한국식 ‘두레’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기원전 1세기에 벼농사가 시작된 뒤부터입니다. 샤먼(무당) 의식(儀式)인 ‘굿’은 일반적인 제의(祭儀)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굿’과 ‘축제’는 같은 의미로 혼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민속학자 이능화(李能和)는 서낭제가 고대 중국의 촌락제인 성황제(城隍祭)로부터, 서낭당(堂)은 촌락제단인 성황사(城隍祠)에서 유래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속학자 조지훈(趙芝薫)은 원시적인 서낭굿이 후대에 중국 성황제(城隍祭)의 영향을 받아 산신(山神)이 선왕으로, 선왕이 서낭으로 그 모습이 변모했다고 합니다. 사제(司祭)인 샤먼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제의(祭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셔먼(무당)의‘굿’은 불교 수용 이후에 불교와 습합(習合, 서로 다른 학설이나 교리를 절충)하게 되었고, 유교가 수용되고 나서는 유교와 습합하게 되었으며, 기독교 수용 이후에는 기독교와 습합되었습니다.
무당 대신 승려와 유학자가 주최하는 경우, 서낭제(풍년 기원 축제), 해신제(海神祭), 별신제(別神祭, 풍어 기원제), 운수형통제, 대동제 등으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 ・ 조선 시대

고려 시대(AD200)에는 팔관회(八関会), 정월 연등회, 섣달 그믐날의 나례(儺礼) 등 국가적인 큰 행사로서, 불교 축제인 우란분재(孟蘭盆祭)와 석가탄신일 연등회가 성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과거급제를 축하하는 행사와 마을 신(洞神)을 모시는 동제(洞祭)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1392~1910)에 들어가면서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유학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팔관회(八関会)와 정월 연등회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우란분재와 석가탄신일의 연등회 같은 불교축제는 그 전승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중국 사신 영접행사, 궁중 나례 등이 국가적 축제의 성격을 띠고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과거 급제자를 축하하는 삼일유가(三日遊街)와 문희연(聞喜宴)이 양반층의 축제로 정착되었습니다. 서민층에서는 읍치제의(邑治祭儀) 및 동제(洞祭)와 관련된 행사들이 활발하게 전승되었습니다. 또한, 추석 무렵의 난장(乱場, 마을 인근에 노점을 펴고 일시적으로 서는 장), 파시(해산물 거래를 위해 섬이나 바닷가에 서는 장)도 서민층의 축제로서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

나례(儺礼)가 한국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 시대 정종 6년(1040 년)에 쓰여진 것으로 중국의 궁중나례(儺礼)가 고려 궁중나례(儺礼)에 도입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원래 악기를 쫓는 의식이었으나 점차 각종 연희를 공연하는 잡희부(雜戱部)가 확대되면서, 다양한 연희를 통해 잡희(雜戱)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연희는 산악(散楽), 백희(百戯), 나희(儺戯), 산대희(山台戯) 등이 있습니다. 산대(山台) 위에 진열된 인형은 기계 장치에 의한 인형(잡상 놀이)일 가능성이 크고, 이는 일본의 다시(山車)와 중국의 오산(鰲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양반층 축제는 과거급제 시 축하잔치를 하는 문희연(聞喜宴)입니다. 과거급제자가 세악수(細楽手)와 연희자를 거느리고 서울 시가를 사흘 동안 돌아다니는 것에서 유래하여 삼일유가(三日遊街)라 했습니다.
서민층 축제는 정월 보름과 단오 무렵에 지내는 동제(洞祭)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성격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풍요제의(豊穣祭儀)를 겸비한 축제입니다. 이로써 마을 주민 상호간의 공동체 의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의 강강술래, 경기도 지역의 소 놀이굿, 줄타기, 달집 태우기 등의 민속놀이를 통해 모든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4. 한국 축제와 일본 마쓰리의 유사점


같은 종교 의식을 갖고 있다

신을 맞아들이는 것, 즉 ‘신 맞이’가 일본에서 마쓰리(まつり, 祭)가 된 것입니다. 고대 한국인과 일본인은 거의 같은 종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수확을 마치면 한 해의 노고를 치하하고 햇빛과 비를 가져다 주는 신과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때 축제를 여는데 노래, 춤, 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일 두 민족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 민족으로서 제사 때마다 술을 만들어 신과 함께 나눠 마신 것입니다.
2007년 ‘한일축제한마당’ 에서 두 나라에서 생산된 햅쌀로 빚은 술을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나누어 마시는 상징적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마쓰리(축제)’에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지속된 왕권 중심의 율령제와 가문제인 한국과 지방 중심의 봉권제와 씨족제인 일본간에 차이가 생겨나면서, 한일 양국의 ‘마쓰리(축제)’는 다른 양식으로 발전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축제의 유대관계

한일 축제의 유대관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토(京都) 야사카(八坂)신사의 마쓰리(기온 마쓰리)입니다.
사전(社伝)에 의하면 야사카(八坂)신사는 656년 고구려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신(調進副使)인 이리시오미(이리지, 伊利之使主)에 의해 창건됩니다. 야사카(八坂)신사는 국조신(国祖神)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 : 해의여신)의 남동생 스사노오를 ‘우두대신(牛頭大神)’이라는 이름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두천왕(牛頭天王)은 석가 탄생지에 기인한 기원정사(祇園精舎)의 수호신으로 이름은 신라의 우두산(牛頭山)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옛 문헌에 따르면 스사노오는 신의 나라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서 신라 땅 소시모리(牛頭)에 내려 온 후 일본열도의 이즈모(出雲) 지역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전하는‘삼국사기’의 ‘지리지’에는 춘천의 옛 이름이 우수(牛首)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수(牛首) 또는 우두(牛頭)는 으뜸이자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수령(首領)을 말합니다.


일본 최초의 굿판 (굿을 벌이는 장소)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동생 스사노오의 난폭한 행동에 분노하여 아마노이와토(天岩戸:하늘의 동굴)에 숨어 바위로 굴을 막아 버렸습니다. 빛을 잃은 세상은 암흑이 되었고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동굴 밖으로 나오도록 가구라(神楽: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무악)를 시작했습니다. 여신인 아메노 우즈메(天鈿女命)가 바위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너무 몸을 흔든 탓인지 앞 자락이 벌어져 가슴이 훤히 보이고, 하카마(袴)의 끈까지 풀어져 마침내 음부까지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가 궁금해진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바위를 열었고 세상은 다시 밝아졌다고 합니다. 아메노 우즈메는 천상의 여신이라는 의미입니다.‘굿’을 주도한 아메노 우즈메가 일본 최초의 굿판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신화에서도 일본서기에는 오오미카미가“교묘한 동작으로 춤을 추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우스꽝스러운 몸짓이라든가 신들이 웃었다는 묘사는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교토를 개발한 것은 백제에서 온 궁월군(유즈키노키니:弓月君)(일본명:融通)이 만요문자로 우즈라고 불렀습니다. 우즈군(融通君) 우즈마사(太秦)일대에서 개척 후, 호족이 되어 우즈마사사(太秦寺 일본명:고류지(広隆寺)를 건립했습니다. 거기에 일본 국보 제1호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건너 온 미륵보살상인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 일연 선사는 굿하는 곳을 신시(神市)라 했습니다. 현재, 한일의 정치・외교 관계는 어렵지만, 한일 문화교류사업의 중심에는‘한일축제한마당’이 존재합니다.‘한일축제한마당’에 의해 21세기가 신시(神市)로 거듭나 문화와 경제의 한마당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

앞서 말한 것처럼 고사기(古事記)와 야사카신사(八坂神社) 사전(社伝)에서 한일축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일본은 민중문화가 상층문화로 흡수되어 에도시대에도 막부와 번이 마쓰리와 특산물을 장려했습니다. 한편, 한국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상층계층이 금욕적이기 때문에 축제와 같은 민중문화를 즐기지 못하고, 서민축제로 머물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대륙의 침략이나 전쟁 등으로 더욱 쇠퇴해 갔습니다. 즉 축제에 대해, 한국에서는 조선왕조가 중앙집권이었기 때문에 민중 속에서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는 통치 체제 속에 편입됐다는 배경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다른 것은 선비사회와 무사사회, 문인사회의 차이에 있습니다. 일본에서 무사(사무라이)는 서민의 일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감상자로서 인정했습니다. 한편, 한국의 선비들은 천민에 이르기까지 유교적인 윤리로 통제했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에서도 축제의 의미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농촌 등 지역사회의 연대감이나 공통의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의식이 남아있지만, 오늘날에는 모이는 것 자체가 축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 배경 속에서 현대의 축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축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약한 샤머니즘’과 ‘강한 샤머니즘’

한일 양국의 사회 문화와 민속 문화의 형성 과정에서 샤머니즘이 담당해 온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샤머니즘을 크게 분류하자면, 신과 자신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강신형(降神型) 샤먼(강신무)’과 그 지역내의 특정 혈통과 관계되는 ‘세습형 샤먼(세습무)’이 있습니다 .
일본 촌락에서는 현재까지도 계승된 제사와 춤, 민속 행위나 축제 장식의 대부분은 약한 ‘샤머니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의 샤머니즘은 ‘강한 샤머니즘’입니다. 지금까지도 각지에 무당(무속인)이나 점쟁이 등이 있고, 굿을 하거나 제사(神事)를 지내고 있습니다.
‘강한 샤머니즘’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흘러 들어와 ‘약한 샤머니즘’으로 점차 변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샤머니즘의 관여가 한일 축제의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마레비토 신앙’

일본에는‘마레비토 신앙’이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민속학자인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가 명명한 마레비토란 ‘객신(외래영혼)’을 말하는 것으로 공동체 밖에서 찾아오는 신(내방신)이나 방문자(내방자)를 말합니다.
아시아 사회에서는 다신다불(多神多仏)의 다신교를 기반으로 하므로 신과 부처를 유일신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마레비토의 역할은 계절의례로서 ‘봄을 알린다’는 것입니다. 가령 일본의 설에는 어디선가 한 해의 복을 관장하는 신인 도시가미(세신:歳神)가 찾아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도시가미가 바로 마레비토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마레비토 신앙’이 생겨났는지 이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1)일본의 촌락 공동체가 우부스나(産土)라는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 신불(神仏)의 출입이 확인되어 그것을 정리해 ‘진쥬노카미(鎮守の神)’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서낭신(城隍神) 이라 부른다.
(2)계절마다 돌아가는 기원과 축하 주기와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주기가 겹친다.‘마레비토의 방문과 귀환’이 각인되어 있다. 이는 한일 모두 공통적인 특징이다.
(3)‘마레비토 신앙’의 배경에는 천손강림신화(城隍神神話)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왕권을 잡고 군림했다. 한국에서는 북방민족과 중국민족의 문화와 군사적 지식과 기술이 유입되었다.
이는 오늘날에 전해지는 제사의 본질적 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야마토(大和) 정권이 권력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이에 관여한 각지의 호족들이 각각의 독자적인 제사를 복종의식(服属儀礼)으로 하고, 조정에 봉납(奉納)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제사의 종합성이‘밖에서 안으로’라는 유동성(벡터)으로 성립되어 있으며, 이를‘안이 밖을 관리한다’는 식으로 변환되어 왔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일간에는 샤먼들(무당들)의 매개적 편집력의 차이 때문에 다른 점이 보여집니다.



5. 일본 마쓰리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DNA


‘야사카신사 마쓰리(八坂神社祭り, 기온 마쓰리(祇園祭り))’

‘야사카신사 마쓰리(기온 마쓰리)’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입니다.


‘오쿠마카부토 마쓰리(お熊甲祭, 와쿠바타 마쓰리(枠旗祭))’

노토반도(能登半島)는 일본열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해를 향해 북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쓰시마 해류(난류)를 타고 대륙보다 많은 문물이 유입되는 곳이었습니다. 와지마(輪島)는 일본인이 사는 ‘왜도(倭島)’라고도 전해지며, 나나오시 중도(七尾市中島)의 ‘오쿠마카부토 마쓰리(お熊甲祭)’는 고대 한반도의 DNA라 전해지고 있습니다(작가 김달수(金達寿)는 일본 속의 조선 문화라고 지적하고 있다). ‘오쿠마카부토 마쓰리’는 수확을 기뻐하며 풍년을 신에게 감사하는 축제이며, 전국에서 유일한 곳입니다. 매년 9월 20일에 개최되므로 ‘하쓰카 마쓰리(20일 축제)’ 라고도 합니다.
신사(神社) 이름은 구마가부토 아라카시히코(久麻加夫都阿良加志比古)신사입니다.
구마가부토는……신사의 제신(祭神)인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은 쓰누가(角鹿) 게히진구(氣比神宮:기비신궁)에도 전승(伝承)이 있어 게히진구(氣比神宮)의 제신(祭神)과의 관련성을 고려하면 구마가부토 아라카시히코(久麻加夫都阿良加志比古)는 일본의 14대 주아이천황(仲哀天皇)이고 구마카부토(熊甲)는 천황의 시호로 추측됩니다. 주아이천황(仲哀天皇)은 야마토 다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 둘째 왕자로 구마소(熊襲)정벌 도중, 지쿠젠국(筑前国) 가시이궁(香椎宮)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그의 부인 진구황후(神功皇后)는 후에 전국의 하치만사(八幡社)의 제신(祭神)이 되는 오진천황(應神天皇)을 복중에 품고 삼한을 정벌(三韓遠征) 했다고 합니다. ‘오쿠마카부토 마쓰리(お熊甲祭)’의 진홍색 깃발은 진구(神功)의 삼한 정벌시, 군선(軍船)의 배 깃발과 같습니다. (고대의 해전(海戦)은 통상적으로 노보리바타(幟旗:진영 주위의 큰 깃발)를 세우고 전쟁을 했다) ‘오쿠마카부토 마쓰리’를 비롯해 노토(能登) 마쓰리에 자주 등장하는 사루타히코(猿田彦:일본의신)는 교토 ‘기온 마쓰리’에서 다시(山車)의 선두에 서서 행렬을 지휘하며 ‘기온 마쓰리’가 노토에 전파하여 ‘와쿠바타 마쓰리(枠旗祭)’와 합류한 것으로 와쿠바타 마쓰리(枠旗祭)와는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노토(能登) 특유의 대형 기리코 또한 ‘기온 마쓰리’의 다시(山車:배웅부분)와 ‘와쿠바타 마쓰리’의 노보리바타(幟旗)가 합체된 것으로 이것은 후에 동북 지방으로 전파되어 ‘네부타’가 된 것입니다.


‘시와스 마스리(師走まつり) ’

고대 한반도 남서부에 있던 백제(346년-660년)와 일본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660년 백제의 멸망으로 백제의 왕과 왕실, 귀족을 포함한 수천여 명의 백제인이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왕족과 귀족을 비롯해서 기술이 있는 백성도 상당수 등용되었습니다.

‘마카도 신사 연기(神門神社縁起)’라는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정가왕(禎嘉王)은 장남 복지왕(福智王)에게 양위한지 삼 년이 되던 해에 내란(백제와 신라의 전쟁[역주])이 일어나 그 난을 피해 복지왕(福智王)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간다. 756년에 아키국(安芸国)의 이쓰쿠시마섬(厳島) 근처에 도착한 일행은 2년 동안 머문 후, 신라의 추격을 피해 규슈(九州) 북부 쓰쿠시(筑紫)를 향해 다시 배를 출항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되어, 정가왕(禎嘉王)은 히무카국(日向国)의 가네가하마(金ケ浜))에, 복지왕(福智王)은 현재의 고유군 다카나베정(高鍋町)에 표류했습니다. 그리고 궁거(宮居)를 정하기에 앞서 점을 쳐서 정가왕(禎嘉王)은 서쪽으로 산 속 7~8리의 미카도(神門)로, 복지왕(福智王)은 18km 떨어진 현재의 기조정 히키(木城町 比木)에 궁거(宮居)를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자가 각각 궁거(宮居)를 정하고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지만, 수년 후 신라의 추격군을 맞이하여 정가왕(禎嘉王) 군대는 미카도(神門) 근처의 이사카사카(伊佐賀坂)에서 전투를 벌였고, 복지왕(福智王)도 군사를 이끌고 싸워 마침내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가왕(禎嘉王)은 이때 전사했으며, 사후 미카도 다이묘신(神門大明神)으로서, 복지왕(福智王)도 사후 화기다이묘신(火弃大明神)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음력 12월 18일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의 시제(例祭)때, 복지왕(福智王)을 모시는 히기 신사로부터 정가왕(禎嘉王)을 모시는 미카도 신사까지 약 90킬로미터의 먼 길을 신관(神官), 우지코(氏子, 씨족신을 받드는 후손들[역주]) 등과 함께 신행(*御神幸 신이 납시는 일[역주])을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시와스마쓰리(師走まつり)’입니다.

‘시와스 마쓰리’가 열리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는 정가왕(禎嘉王)이 일본으로 건너올 때 가져왔다는 동경(청동거울)이 지금도 소중한 보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정가왕(禎嘉王)과 복지왕(福智王) 부자의 만남을 재현하는 시와스 마쓰리는 미카도(神門)에서 사흘 동안 엄숙하고 화려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아오모리 네부타 마쓰리(青森ねぶた祭)’

아오모리 네부타 마쓰리는 아오모리(青森)시에서 매년 8월 2일부터 7일까지 열리는 여름 축제로 1980년 일본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将軍),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에조 토벌(蝦夷討伐)의 전장에서 적을 방심시키고 유인하기 위해 대형 등롱(燈篭), 피리, 북으로 신명을 돋운 것이 유래입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는 백제계의 도래인인 아치사주(阿知使主)의 후손이며 다무라마로(田村麻呂)의 조부(祖父)인 이누카이(犬養)와 가리타마로(苅田麻呂)와 함께 무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93년에 무쓰국(陸奥国)이 현지 토착 세력인 에미시(蝦夷)와의 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오토모 오토마로(大伴 弟麻呂)를 보좌하는 부대장의 한 사람으로서 공을 세웠습니다. 오토마로(弟麻呂)의 후임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군대의총수)이 되어 지휘를 잡고 801년에 적대적인 관계인 에미시(蝦夷)를 꺽었습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8세기~12세기)에 뛰어난 무인으로 추앙 받으며, 후대에 다양한 전설을 낳았다. 문(文)의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와 무(武)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는 문무의 상징적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딸 하루코(春子)는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비가 되어 후지이 친왕(葛井親王)을 낳았습니다.


‘가라코오도리(唐人踊り)’

오카야마현(岡山県) 세토우치시(瀬戸内市) 우시마도정(牛窓町)에서 예로부터 전해지는 축제입니다. ‘가라코오도리’는 매년 10월 넷째 일요일의 가을축제에 신사(神事)로서 봉납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오카야마현 지정 중요무형민속문화재가 되었습니다.
‘가라코오도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설이 있습니다.
(1) 나가사키(長崎)의 당인(唐人)저택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의 예능이 각지에 전해졌다는 설
(2) 류큐(琉球)시설에 수행했던 악대와 곡예사 등을 모방했다는 설
(3) 조선통신사에 동행했던 악대와 곡예사 등을 본떴다는 설
(4) 임진왜란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이 전했다고 하는 설
(5) 유럽인의 풍속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
오카야마현 우시마도쵸(牛窓町)의 ‘가라코오도리’는 춤의 형태, 의상, 곡절(曲節) 등으로 보아 에도시대 조선통신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6. ‘한일축제한마당’의 역사


2005년 : 제1회‘한일축제한마당’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小泉) 총리는 한일 양국의 상호 이해와 우의 증진을 목적으로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인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 2005’로 정했습니다. ‘한일 우정의 해 2005’ 기념 행사 로 일본에서는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화백을 위원장으로, 한국에서는 박성용(朴晟容)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실행위원회가 주최되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측에서는 원활한 추진을 지원하는 조직으로서 2004년 7월 민관으로 구성된 ‘한일 우정의 해 2005 현지추진본부’가 발족되면서, 팜플렛 작성이나 공식 사이트(http://www.jkcf.or.jp/friendship2005/) 출시 등을 비롯해서 학술, 예술, 스포츠, 정치, 경제, 사회 등을 포함한 폭넓은 분야의 지원 활동이 시작 되었습니다.

2005년이 되어 일본측 실행위원회는 사업추진 시나리오를, ‘서(序)’ : 서로를 알아가다 = 한일 우정의 만남, ‘피(破)’: 함께 땀 흘리며 = 한일 우정 체험, ‘급(急)’ : 함께 노래하다 = 한일 우정의 미래로 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나가자 미래로, 다같이 세계로’를 슬로건으로, 한일간에 700 여건의 교류 행사가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독도’,‘교과서 문제’,’야스쿠니(靖国)신사 참배’ 등의 정치 문제로 NHK교향악단 연주와 청소년 축구대회 등 몇몇 행사가 연기, 중지되었습니다. 양국의 전도 유망한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관계자들의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쇼치쿠 다이가부키 치카마쓰자(松竹大歌舞伎近松座)의 인간 문화재 나카무라 간지로(中村鴈次郎)가 연기한 ‘소네자키 신주(曽根崎心中:소네자키 동반자살)’, NHK와 SJC가 공동 주최한 ‘NHK 노래자랑 in Seoul’한국 외교부 및 일본 외무성 주최’의 ‘한일축제한마당’, ‘다카라즈카(宝塚歌劇) 가극단 공연’, MBC-NHK 합작 ‘한일 교류 콘서트’ 미래를 향한 ‘청소년 한일 심포지엄’ 등이 큰 호응을 얻으며 무사히 끝났습니다.

특히, 9월 24일 개최된 양국 외교부 주최의 ‘한일축제한마당’은 각별했습니다. 양국의 문화나 관습차로 파란이 일 수 있었지만, 한국과 일본의 축제가 하나가 되어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렇게 친해질 수 있다.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 는 사실을 역력히 보여 주었습니다. 일본측 실행위원인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교수의 기술(記述)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맑고도 드높은 가을 하늘 오후, 일본의 샤미센, 북(太鼓), 가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학로에 모인 한국인은 그 이질성을 감수하며 축제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한국과 일본의 잇단 공연에 정신 없이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화려한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밤의 어둠이 찾아들자 빛의 축제인 아키타 간토(秋田竿燈)가 시작되었다. 10 미터에 이르는 장대가 휘도록 매달린 등불을 오직 한 명이 지탱하면서, 손과 어깨, 이마, 허리에 올리는 연기를 펼칠 때마다 “오오!”라든가 “우와!”라는 탄성이 울려 퍼진다. 퍼레이드의 마지막은 거대한 수레가 밤하늘을 수놓는 듯한 행렬로 거친 무사의 눈이 돋보이는 화려한 색감의 아오모리 네부타(青森ねぶた)였다. 그 기괴하고 이질적인 아이콘이 갖는 힘에 눌려 서울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하네토’가 “랏세라!, 랏세라!”를 외치기 시작하자, 마음을 열고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2006년: 제2회‘한일축제한마당’

‘한일 우정의 해 2005’ 사업보고인 ‘한일 시민 교류와 상호 이해 촉진에 관한 제언(한일간 교류확대에 대한 제언)’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철학자로 알려진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위원은 “‘한류’와 ‘LOOK KOREA’를 통해 두 나라는 상호작용의 관계를 구축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양국은 ‘이데올로기의 한일 관계’나 ‘반발 감정의 한일 관계’가 아닌 ‘창조적 한일 관계’로 전환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의견에 힘입어 많은 관계자로부터 ‘창조적 한일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현지 추진본부의 기능을 중단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지속시켜야 한다는 의견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기능을 ‘한일 Friend‐ Ship Committee 06’로 명칭을 변경하고, 한국에서 양국의 문화 교류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고 주 사업을 ‘한일축제한마당’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명칭에 연도를 넣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일축제한마당 2006’(http://kojafe.org/www/2006/index_j.htm)은 주한일본대사관(외무성)주도로, 기획・준비는 일본 측 사무국에 부탁하고, SJC는 ‘한일축제한마당’ 운영을 지원하는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실행위원회를 양국에서 발족시키고, 위원장으로는 한국 측은 한양대학교 김용운 명예교수, 일본 측은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화백에게 부탁했으며 경제, 학술, 음악 등의 분야에서 위원으로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9월 23과 24일, 천고 마비의 계절인 가을 하늘 아래 ‘한일축제한마당’이 대학로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대학로에는 ‘무대 공연’과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마로니에 공원은 ‘서브 스테이지 공연’이 진행되어, 양국의 다양한 전통문화가 선보였습니다. 특히 퍼레이드는 ‘리듬 & 파워’, ‘한일 전통 예능’, ‘한일 요사코이 페스티벌 & 간토(竿燈)’의 3부로 구성되었습니다.
한국측에서는 ‘안동 저전동농요(安東苧田洞農謡)’, ‘금산농바우끄시기’, ‘사자탈춤’ 등 지방무형문화재를 비롯해 31 개 단체가 참여했으며, 일본측에서는 이와테(岩手)의 ‘오니켄바이(鬼剣舞)’, 오키나와(沖縄)의 ‘류큐 무용(琉球舞踊)’, 구마모토(熊本)의 ‘아마쿠사 하이야(天草ハイヤ)’, 아오모리(青森)의 ‘쓰가루 샤미센(津軽三味線)’,‘아키타 간토(秋田竿燈)’ 등 17단체가 참여했으며, 2005년처럼 약5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습니다. 특히 서울일본인학교 학생들과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인들에 의한‘요사코이 아리랑 춤’은 큰 갈채를 받으며 주한 일본인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한일축제한마당’의 효과는 시민뿐만 아니라 양국 정부와 서울특별시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2007년 가을에 열린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장관(전 유엔사무총장)이 이듬해 한국측도 일본에서 같은 행사를 개최하고 싶다는 의사 표명이 있었습니다. 또한 서울특별시에서도 이듬해 축제에 참여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한편 대사관(외무성) 주도라 해도 전년과 달리 일본 정부의 예산 지원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장 큰 문제는 협찬금 마련이었습니다. 전년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한일의 많은 기업, 또 SJC 법인 회원 기업으로부터 약 4억원 규모나 되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007년: 제3회‘한일축제한마당’

3년째가 되는 2007년에는 전년도의 반성을 바탕으로 SJC 회원을 중심으로 열정적인 자원봉사들은 자신이 원하는 축제를 만들어 보겠다는 열기가 높아졌습니다. 이런 열기 속에 일본대사관과 외무성도 자원봉사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는데 동참해 주었습니다. 김용운 명예교수와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화백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각각 실행위원장 취임의 뜻을 밝혀주었고, 멤버 모두 기뻐하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아마추어지만 “우리의 진정성이 담긴 축제를 만들자”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 한일 두 나라의 콜라보레이션, 즉 ‘비빔밥 상태를 만드는 한일축제한마당’을 상정하고 테마를 ‘함께 만드는 우정의 바퀴’, 키워드를 ‘보고 만지고 이야기하자’로 정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시민들이 보고, 만지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행사장은 가능하면 “서울 중심인 시청 앞 광장에서 했으면……”하는 것이 자원봉사자 모두의 꿈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측 실행위원회로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의 축제를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꿈이 하늘에 통했는지, 서울특별시가 ‘Seoul’의 이름을 넣는 조건으로 대학로에서 시청 앞 광장과 청계천 주변의 사용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명칭을 ‘한일축제한마당 2007 in Seoul’(http://www.kojafe.org/)’로 하게 되었습니다.

10월 하순 서울의 아침 저녁은 매우 추울 거라는 점을 감안해서, 10월 20일, 21일 주말에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400주년 기념을 맞이하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에도(일본)를 방문하고 귀국하는 퍼레이드를 시청 앞 광장에서 실시하는 날에 맞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온이 떨어질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첫날은 최저 기온 3.2도, 최고 기온 9.6도, 평균 6.2도였으며, 북쪽 바람 풍속 4m...상상을 훨씬 넘는 추운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22단체 약 500명, 한국에서 40단체 약 1500명의 참가자는 이러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한국 측에서는 용강고교 마칭 밴드, 서울여상, 한국외대, 동국대, 상명대가 일본측에서는 PL학원고교(PL学園高校) 배턴팀, 이와테현(岩手県) 이와야도(岩谷堂) 농림고등학교(農林高校)의 시시오도리(사슴춤), 시마네현 하마다고교(島根県浜田高校)의 이와미 카구라(石見神楽), 구마모토현 가모토농고(熊本県立鹿本農業高校)의 야마가 도오로(山鹿灯篭), 시즈오카현(静岡県)의 아카이시 다이코(赤石太鼓) 등이 참가하여 대학생과 고교생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점입니다.



제 1부 무대에서는 진도북놀이, 류큐(琉球)음악, 제주 해녀춤 등 양국의 전통 예술이 번갈아 선 보였습니다. 스테이지 마지막 날에는 한일 양국의 어린이 혼성 합창단의 청아한 목소리가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 2부 퍼레이드는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청계천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거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 이와테 시시오도리(岩手鹿踊り:사슴춤), 시마네 이와미 카구라(島根石見神楽), 아키타 간토(秋田竿燈) 등 13여 지역의 전통 예능이 펼쳐졌고, 한국에서도 제주도 칠십리민족예술단, 고성농요(固城農謡), 봉산탈춤을 비롯한 10여 개 지역의 전통 예능이 추위를 날려버리는 듯한 퍼포먼스를 펼쳐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퍼레이드 마지막은 400주년을 기념하고 일본에서 귀국한‘조선통신사’일행이 위풍 당당하게 입장하여 행진함으로써 관중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제 3부 무대는 기온이 많이 내려간 쌀쌀한 밤, 시청 앞 광장에서 조선통신사 일행의 정사(正史)가 서울시장(대리)이 연기하는 조선 왕에게 귀국을 보고하는 의식에서 시작하여 한일무용, 음악이 번갈아 연주되면서 그 열기가 고조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진도 강강술래에서는 무용수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관중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 손에 손을 맞잡고"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하면서 흥겹게 노래 부르며 함께 춤을 즐기는 사이 어느덧 큰 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순간 시청앞 광장은 바로 우리가 생각했던‘비빔밥 상태의 축제’가 되어 한국인과 일본인이 일체화되면서 천지를 달리는 듯한 환희를 느꼈습니다.
오후 9시 가까이 된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한일의 가교(架橋)가 되고 싶다는 인기 가수 윤하씨의 미니 콘서트로 ‘한일축제한마당’의 피날레를 장식하며 추위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에게 감동과 여운을 남겼습니다.

다음날의 청계천 광장 앞에 모인 양국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은 한일의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 관광객을 포함 약 7만 명이 바로 ‘보고, 만지고, 이야기’함으로써 한일 축제와 음악, 무용 등 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가 깊어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의 축제를 하는 것은 리스크가 높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기우로 끝났습니다.

전년도의 이월금도 없이 민간(SJC)주도의 자원 봉사 활동으로 시작되었으니 금전적인 뒷받침이 없는 가운데 당초 기획은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 공사의 열정적인 협찬금 모집 활동 등으로 한국 국내기업을 비롯해 서울특별시외 관계 소관에서, 그리고 외무성에 의한 일본기업의 협조, 무엇보다 SJC법인 회원기업의 적극적인 협찬 등의 따뜻한 지원을 받고 약 7억 원의 협찬을 얻어 계획 이상 규모의 ‘한일축제한마당’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2008년 : 제 4회 ‘한일축제한마당’

2008년은 한일 양국이 미래지향의 관계로 내디딘‘98년 공동선언’이후 꼭 10년의 고비였습니다. 실행위원장으로 한국측은 김용운 명예교수가 계속 하였지만 일본측은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화백의 서거로 인해 나리타 유타카(成田豊)덴쓰(電通)의 최고 고문이 실행위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초봄에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 등이 일어나고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로 시청앞 광장이 7월 가까이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야말로 개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테마는 ‘각양각색의 한국, 각양각색의 일본’으로 했습니다. 또한 축제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축제의 역사적, 사회적 의의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축제 관련 책 ‘자 놀아보세 - 다문화 이해를 위한 한일축제’(김용운・오구라 키조(小倉紀蔵)감수)를 한국에서는 토향(土香), 일본에서는 아도니스(アドニス書房)・카와이데 쇼보 신사(河出書房新社)에서 출판했습니다. 테마에 따라 9월 27일은 “만남의 한마당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로 하고 28일은 “어울림 한마당 ‘새로운 발견! 새로운 미래!’" 로 서울시청 광장과 청계 광장 두 곳에서 양국 각각 25단체가 가을 하늘 아래,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2008년은‘한일 관광의 해’로 자리 매김되면서 일본 국토교통부와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과 공적 지원금 덕분도 있고 일본에서는 도야마현립(富山県立) 난도타이라(南砺平)고등학교를 비롯한 9개교가 출연하여 10만 명의 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이제’한일축제한마당’은 국가간의 교류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상호이해 및 우호친선을 촉진하는 교류와 축제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2009년 : 제 5회 ‘한일축제한마당’

2009년도는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 개최라는 역사적 이벤트가 된 해로써,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전 유엔사무총장)의 생각이 실현된 해가 되었습니다. 일본측 실행 위원장은 나리타 유타카成田豊)덴쓰(電通)의 최고 고문이,그리고 한국측은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취임했습니다. 서울과 도쿄에서 보조를 맞추어 테마를‘함께하는 서울-도쿄! 함께 가는 미래!’라고 정했습니다. 이번‘한일축제한마당’은 화창한 날씨에 6만 명의 관중이 참가한 성공적인 개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쾌청한 날씨가 성공의 요인이었습니다. 다음날 이어진 폭우는‘축제’성패의 결정 요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한일관계를 둘러싼 환경도 좋았습니다. 한국 언론도 하토야마(鳩山) 정권 출범이 한일관계 개선을 가져온다는 기대를 연일 보도하는 가운데 지난해 같은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일반 관중도 한일교류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관중의 심리를 더욱 완화한 것이‘한일 동시 개최’라는 키워드였습니다. 회선을 사용한 영상과 음성의 교신은 완벽하지 않았지만‘한일 동시 개최’라는 워드(ward)는 관중의 심리적 장벽을 줄여 주었습니다. 또한 도쿄 개최가 언론에서 거론되고 서울 행사도 한국 언론에서 크게 보도된 것이 좋았습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부 "야! 오마쓰리다! 다함께 춤추자" 페스티벌은 여러 명의 대학생 팀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무대에 등장시켜 한일 우호를 연출한 것이 좋았습니다.
제 2부 ‘함께 가는 미래!’
제 3부 ‘우정의 한마당 Friendly Korea-Japan’ ‘한일 동시 개최’기념 이벤트로‘강강술래’를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춤추는 기획을 하였으나 도쿄 쪽 사정으로 중단된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2010년 : 제 6회 ‘한일축제한마당’


2010년 운영위원회 양국 구성원 간의 신중한 논의 끝에 행사 테마를‘오랜 역사와 밝은 미래’로, 슬로건은‘우리는 通한다 - 통하는 우리, 통하는 마음, 통하는 미래’로 스타트했습니다. 서울이‘주(主)’이고 도쿄가‘종(従)’이라는 형태로 서울과 도쿄에서 합의 아래 개최했습니다.
옛 부터 양국 사이에는 다양한 교류가 있는 역사를 구축해 왔습니다. 한국인에게 꺼림칙한‘한일합방 100주년’도 역사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불식(払拭)시키는 역사•문화의 상징이 미야자키 현(宮崎県) 미사토초 난고(美郷町 南郷)지방에서 1300년간 내려온‘시와스 마쓰리(師走祭り)’라고 생각해‘유구한 역사’라는 테마를 구현으로 백제의 영혼을 계승하여‘시와스 마쓰리(師走祭り)’를 한반도에서 재현하고자 기획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측의 생각을 존중하여 한국측도 김덕수(金徳洙)선생이 중심이 되어 1300년만의 귀향을“마지와푸리(迎解)”에서 맞이한다는 구성을 계획하고 이러한 연출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에 아울러 국립국악원‘대백제의 숨결’, 조선통신사 시대에 일본에 전해져 지금도 오카야마(岡山)의 우시마도쵸(牛窓町)에서 전승되는 ‘가라코 오도리(唐子踊)’에도 출연 제의를 했습니다.
‘빛나는 미래’라는 테마로 청소년교류공연과 전통예술공연에 미래를 짊어질 고교생 등이 출연 하였고, 이와 더불어 더욱 돋보였던 것으로는‘아오모리 네부타 마쓰리(青森のねぶた祭)’, ‘아키타 간토 마쓰리(秋田の竿燈祭り)’, ‘고엔지 아와 오도리(高円寺阿波踊り), ‘한국의 봉산탈춤’, ‘남사당 놀이’등의 공연이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안동 탈춤’은 스케줄 문제로 참여할 수 없어 아쉬움이 컸습니다.
10월 2일(토)의 첫째 날에는 뜻하지 않게 비가 내렸습니다. 한일 전통예술공연‘모리오카 산사오도리(盛岡さんさ踊り)’한국의‘오고무’까지는 그럭저럭 날씨가 괜찮았습니다만,‘가라코 오도리(唐子踊り)’를 공연할 무렵에는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멋지게 춤을 선 보여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개막식은 본격적으로 쏟아진 비로 인해 협찬사 및 VIP들을 비롯한 손님 여러분께 본의 아닌 불편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틀 째인 일요일 아침은 날씨가 흐린 탓으로 걱정했지만 오후부터는 맑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해 안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계천 행사장에서는 강풍으로 무대 간판이 넘어지고 출연 고교생이 부상당하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더 이상 큰 문제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또한 서울광장에서는 태평로에서 FI코리아 그랑프리의 프리 이벤트가 진행되어 소음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일부 뜻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지만 메인 행사인‘시와스 마쓰리(師走祭り)’도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장엄하게 거행되었으며, 피날레‘통하는 요사코이 아리랑’, 강강술래’로 땅거미가 내려앉은 서울광장은 바로 한일 비빔밥 상태가 되어 흥분과 감동이 물결쳤습니다.
10월 3일이라는 개천절에 일본의‘시와마쓰리(師走祭り)를 서울 한복판에서 공연을 해도 누구 하나 방해하거나 비난하는 한국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피날레에서는 한일 비빔(혼합)상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양국 시민이 일체화된 것입니다.


2011년: 제 7회‘한일축제한마당’

2011년에는 한일관계의 새로운 100년의 시작이라는 의미와 지난 해의 과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에 의해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피해 상황이 큰 만큼 축제를 중단할 생각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로부터 "규모는 작아도 해야 할 것은 할 것"이라는 성원의 물결이 전해졌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한국이 재빨리 구조대와 구호 물자, 기부금 등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고마워요 한국! 힘내요 일본!"을 테마로, 슬로건은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로 개최하였습니다.
대지진의 영향으로 협찬비 모금이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예산규모를 지난 해의 절반수준으로 억제하고 “작게 만들어 크게 키우자"의 정신으로 운영을 진행했습니다. 따라서, 개최일은 하루로, 개최장소는 서울시청앞 광장 1개소와, 테마에 따라, 도호쿠(東北)지방의 피해를 입은 현(県)에서 그 현(県)을 대표하는 축제를 초빙하고 일본측으로부터 "고마워요 한국!"이라고 감사의 뜻을, 한국측에서는 "힘내요 일본!"과 같은 격려의 마음을 교류하는 장을 만들어 보자는 염원아래 프로그램은
① "고마워요 한국! 힘내요 일본!" = 공식 행사
②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 본 공연
③ "즐기는 우리" = 마당놀이

제 3부는 무대와 공연장이 일체가 되는 바로 "즐기는 우리" = 마당 놀이 무대로 진행되었습니다.무대와 행사장이 일체가 되어‘요사코이 아리랑’춤이 펼쳐지고 행사장은 더욱더 열기를 띠었습니다. 그 열기가 식지 않은 가운데 일본을 대표하는 축제‘아키타 간토(秋田竿燈)와‘아오모리 네부타(青森・ねぶた)가 가을의 석양 속에서 공연이 펼쳐졌고 이에 질세라 한국의‘평택 농악(平澤農楽)’이 올 가을의 풍년을 축하하듯이 곡예사와 같은 신명 나는 공연으로 축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전라남도에 전해지는 한국 정서 가득한‘강강술래’의 노래 소리가 행사장에 울려 퍼지고 어느새 행사장 안에는 남녀노소가 손에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서울 시청광장을 흥겹게 돌면서 한일이 함께 혼연 일체가 되는 장관을 연출하였습니다.

새삼 인터넷 시대라는 것을 확인하고 향후 인터넷, HP활용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2012년 : 제 8회 ‘한일축제한마당’

축제 장소는 지금까지 시청앞 광장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2012년에는 사용이 어렵다는 소식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축제는 밖에서 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서울의 다양한 야외 광장을 검토했습니다만 모두 어중간하기만 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날씨 걱정할 필요도 없고 축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곳으로 COEX 전시장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COEX 전시장에서는 물건 판매도 가능한데다가 동문 앞 광장에서 늘 하는 강강술래, 요사코이 아리랑 등에서 한일 양 국민의 일체화, 즉, 비빔 상태가 될 수 있는‘마당놀이’를 만들 수도 있어 스케줄을 확인, 10월 3일(수) 개천절로 정했습니다. 동시에 2012년 테마는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회복한 일본을 어필하는 마음을 담아‘희망찬 한국, 활기찬 일본’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올해 축제운영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김과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도입했습니다.

(1) 자원 봉사자의 적극적 참여
영토 문제, 위안부 문제 등으로 양국 관계는 근년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습니다만, 한일축제 자원봉사 희망자는 950명으로 지금까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그 대부분은 한국 젊은이였습니다. 문화는 정치와 관계 없음을 실감했습니다. 엄선한 결과 400여명의 분들이 자원봉사활동에 참가하여 주었습니다.

(2) 부스 운영
COEX 전시장이라는 이점은 부스공간에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부스는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했습니다. 지난해까지 호평이었던 지방자치단체부스, 체험부스, 그리고 올해 처음 시도한 기업부스입니다. 어느 부스에도 사람이 많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동북(東北)관광 추진기구의 부스에서 니혼슈(아마가타현 일본술) 시음은 순식간에 동이 났습니다. 기업부스에서는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헬로키티의 산리오와 건담 반다이, 지브리 스튜디오 출점과 한국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뽀로로 출점도 있어, 가족단위 방문객들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다른 기업부스도 각각 꾸준히 활발한 왕래가 이어져 향후 반응이 기대되었습니다. COEX 전시장으로 행사장을 옮긴 성과입니다


(3) 새로운 프로그램의 시도>
우선, 무대 공연의 포문을 열었던 SJC 주재원을 중심으로 '아버지 밴드’그룹의 ‘곤드레만드레 밴드'의 열연입니다. SJC가 참여하는 연간 주요행사의 하나라는 의미에서도 SJC 아마추어 밴드의 첫 참가는 의미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일본의 인기 신인배우 '사토 타케루(佐藤健) 토크쇼’그가 주연한 영화 '바람의 검심'의 한국 상영에 맞춰 출연이 실현되었습니다. 적은 예산이었으나 인터넷 광고 등의 효과로 기대 이상의 집객과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셋째는 가장 인기 있는 KPOP 3쌍의 출연입니다. 새로운 변화의 이해는 무대 공연장에서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고 자부하고 내년 이후에는 더욱더 발전하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전례 없는 최악의 한일관계 속에서 개최되는 축제는 솔직히 마지막까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악천후에도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존재를 목표로"라는 우리의 강한 신념을 관철한 것이 성공을 이끈 원동력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올해 COEX 전시장에서의 개최는 날씨의 염려가 없고, 많은 부스 설치가 가능했으며, 교통수단이 편리하여 관객 동원에 유리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한 신념이 이 축제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술한 바와 같이 새로운 프로그램의 시도도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무대 공연에서 동문 앞 광장에서 펼쳐진 마당 놀이의 흐름을 이어 일본의 전통적인 아키타 간토(秋田竿燈)가 하늘을 수놓고 아오모리 네부타(青森ねぶた)마쓰리와 기후 하나미코시(岐阜花みこし)가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이윽고 한국의 강강술래로 축제가 한층 무르익었습니다. 한일 양국 시민의 일체화가 탄생되는 환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순간, 모두가 시공을 넘어 한일 양국의 뜨거운 유대감을 체험했습니다


2013 년 : 제 9 회 '한일축제한마당’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정치・외교상에서의 한일 불협화음은 일본의 아베(安倍) 정권, 한국의 박근혜 정권의 출범에 따른 새로운 싹이 기대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아무런 진척 없이 불협화음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한일축제한마당’은“양국 사이에 어떤 악재가 있어도 항상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는 등대의 불빛처럼 한일 우호의 상징"이라는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올해의'한일축제한마당'은 내년에 10회째를 맞는 서막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축적 된 노하우를 바탕으로‘제 10 회 한일축제한마당'을 어떻게 기념하고 형성해야 할 것인지 준비단계의 출발 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나카 마사시(田中将志) 운영위원장의 연임으로 올해 운영위원회는 한국인 24명, 일본인 12명의 자원봉사자 총 36명(남자:16 명, 여자:20 명, 그 대부분이 20대 젊은이들)으로 2월, 순조롭게 스타트했습니다. 개최 장소는 지난해에 이어 날씨 걱정 없는 COEX 전시장으로 정하고 날짜는 추석 전인 9월 15일(일)로 했습니다. 테마도 양국의 새 정부에 대한 기대에 맞춰‘움트는 희망, 미래로'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축제의 기본 방침인 "불역유행(不易流行:불역은 시대의 변화를 초월해 불변하는 것, 유행은 그때마다 변화하는 것으로 진정으로 유행하면 자연히 불역이 생기고, 또 진정으로 불역하면 유행이 형성된다. – 하이쿠 작가, 바쇼[역주])”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올해의 축제운영도 새로운 시도를 도입했습니다.

① 인터넷 활용
자원 봉사자의 적극적인 참여와 4만 5천명의 관객 동원
염려되었던 정정(政情)불안과 관계없이 축제에 참여한 자원봉사는 950명에 달하였으며 최종적으로 730 명의 청소년 자원봉사자가 선별되어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아침 일찍부터 젊은이를 중심으로 행사장을 가득 매운 결과 작년을 상회하는 4만 5천명의 관중으로 행사장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습니다. 4만 5천명의 관중 모두가 인터넷 효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터넷의 파급 효과는 실로 대단하다고 실감하는 동시에 한일 교류 문화는 정치와는 관계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② 부스 운영
올해는 작년보다 넓은 COEX ・ B 전시장에 (1) 지방자치단체부스 (2) 체험이벤트부스 (3) 기업부스 (4) 식품&판매부스의 4개의 존을 마련하여 작년에 비해 늘어났고, (5) 휴식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부스에도 사람이 많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한일 전통놀이 코너 (일본식 떡메치기, 긴교 스쿠이(금붕어 건지기), 요요쓰리(물풍선 낚시), 한국의 널뛰기, 제기 차기 등)는 행렬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성황이었습니다. 입구에 관광청(JNTO)이 설치해 놓은 붉은 초롱도 축제에 빼놓을 수 없는 운치로 흥을 더해주었습니다.



③ 축제 'History Wall’
제 1 회부터 축제의 역사‘History Wall’을 회장 입구에 장식했습니다. 각 연도의 이벤트를 사진에 장식하여 당시의 시대 배경, 슬로건 등을 게재했습니다. 물론, '서울의 한일축제한마당’뿐만 아니라 2009 년부터 시작된 '도쿄의 한일축제한마당’도 장식했습니다.

④ 에코백 제작 및 프로모션
후지산의 세계 문화 유산 등재를 기념 해 야마나시(山梨) 현립 미술관이 소유한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의 ‘아카후지(赤富士)' 와 '구로후지(黒富士)’의 인쇄 권한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에코백에 인쇄하여 기업의 판촉품으로 활용하고 그 보조금을 축제 기부금으로 활용했습니다.

⑤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도
지난해 리뷰를 바탕으로하여 다음 사항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1) 시간 관리를 엄격히 하고 (2) 스페셜 게스트의 충실 (3) 사회자의 충실 (4) 청소년을 위한 JPOP, KPOP의 충실 (5) 일본의 대표적 마쓰리 초빙 (6) 한일합동 콜라보레이션의 충실.

(1) 엄격한 시간관리
연출 시간을 엄격히 지키는 동시에 출연 단체 수도 작년 24에서 21로 엄선했습니다. 리허설 때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프로그램 진행은 원활하였습니다.
(2) 스페셜 게스트의 충실
한일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배우 미우라 하루마(三浦春馬), 여배우 미요시 아야카(三吉彩花)외에도 미스 일본 기모노인 스즈키 에리카(鈴木恵梨佳)를 초빙하여 행사장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3) 사회자의 충실
올해는 MBC TV에 출연한 여배우로 한국어에 능숙한 후지이 미나(藤井美菜)씨를 메인으로 KBS의 협력을 얻어 젊은 아나운서 3명(한석준,이제홍,성세정)이 사회를 맡아 행사장 분위기를 북 돋우는 동시에 원활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었습니다.

(4) 청소년을 위한 JPOP, KPOP의 충실
자유와 에너지 넘치는 걸그룹 'GLAM', 심야 2시에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음악으로 구현하는 한국의 4인조그룹‘2AM’, 그리고 미국의 버클리 음악 대학에서 인연이 되었다는 한일 혼성의‘Hemenway’의 연출에 젊은이들이 환호하였습니다.

(5) 일본의 대표 마쓰리의 초빙
단골이었던 '아키타 간토(秋田竿燈)’대신 약 400년의 역사를 가진 리오의 카니발이라고 불릴 정도로 열정적이고 세계적인 춤인 도쿠시마(徳島)의‘아와 오도리(阿波踊り)’를 초빙했습니다. 또한 '아오모리 네부타(青森ねぶた)’대신에‘히로사키 네부타(弘前ねぷた)’를 초빙했습니다.

(6) 한일 합동 콜라보레이션의 충실
오프닝 공연의 오카리나 유닛 EAST을 비롯한 김덕수 사물 놀이패 + 와다이코 아스카(和太明日香), 상명대한오름무용단 + 약동(躍動)이 한일합동의 하모니를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피날레에서 가이(甲斐)・풍림화산(風林火山) -> 오키나와 에이사 -> 약동(躍動) -> 아와오도리阿波踊り -> 요사코이 아리랑-> 사물놀이로 릴레이 공연이 이어져 행사장 가득히 그야말로 비빔밥 상태와 같은 축제교류의 장이 수놓아졌습니다. 교류의 환희는 행사장 가득히 울려 퍼지고 양국의 남녀노소가 마치 벚꽃과 무궁화 꽃이 경쟁하듯이 춤추고 있었습니다. 그 원 안에 벳쇼(別所) 일본대사 부처와 강신호 실행위원장이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춤을 추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치・외교에서의 한일 불협화음은 여전하고 아직도 한일정상회담 개최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한일문화교류의 상징인 '한일축제한마당'은 지난해를 상회하는 4만 5천명 관중 속에서 성공리에 끝마친 것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많은 일반 시민들에게 문화교류는 공기나 물 같은 것으로 한일 불협화음은 정치인이나 언론에 의한 장난같이 느껴집니다.

축제는 사업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람・물건・자금" 등의 리소스(resource)가 필요합니다.
각각에 대해 리뷰 해 보겠습니다.

‘사람’= ‘Manpower’
・ 한일축제한마당의 실질주최자인 '실행위원회’에는 강신호위원장을 비롯해 20명의 각계 대표가 멤버(올해 새롭게 3 명 증가)가 되고, 협찬 모금 등 건설적인 조언을 받았습니다.
・‘운영위원회’멤버는 시민의 자원봉사로 한국인 24명, 일본인 12명 총 36명이 모여,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해주었습니다. 올해는 순조로웠지만 운영위원장 선임은 매년 고심거리로 후계자 육성이 과제입니다.
・ 축제 당일 자원봉사자는 6월 초순부터 3개월간 인터넷 모집을 한 결과 942명의 응모가 있었습니다. 엄선된 선발 결과 730명을 채용하기로 결정하였고, 불합격에게 정중한 위로 메일로 대응했지만, 응모자 전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물건’= ‘협찬품' , '노하우'
・‘협찬품'에는 출연단체의 항공 티켓과 행사장에서 추첨상품, 자원봉사나 친목회에서 과자, 만두와 음료수 등을 제공하여 축제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 지금까지 9회 개최부터 축적된‘노하우’는 큰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계승할지 기대와 즐거움도 있고,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자금’= ‘Finance’
・ 한일 양국 기업에서 받는 협찬금은 바로 한일축제한마당의 주축입니다.
・ 지금까지 한일기업의 협찬 비율은 한국 6 : 일본 4의 비율이었지만 올해는 거의 5 : 5의 비율이 되었습니다. 정치와 외교정세의 불협화음이 있을 무렵에는 협찬을 거부하는 기업도 늘어남과 동시에, 협찬은 하되 회사명은 밝히지 말아달라는 기업도 생겨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협찬모금은 개인의 힘에 의존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향후 자발적인 기업협찬을 진행 할 수 있는 축제의 매력과 구조적인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2014 년 : 제 10 회 '한일축제한마당'

● 올해의 '한일축제한마당' 자리 매김과 준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安部) 총리의 정상회담도 여의치 않고,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한국인을 비탄 속에 빠트렸을 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일축제한마당 10주년임에도 불구하고 주변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모든 어려움 속에서 ‘축제 10 년, 꿈을 싣고’라고 테마를 정하고, 다나카 마사시(田中将志) 운영 위원장의 연임으로 2월에 순조롭게 운영위원회를 스타트했습니다.

● 올해의‘한일축제한마당’운영 및 프로그램

‘불역유행(不易流行)’과 ‘역지사지(易地思之)’정신을 바탕으로 10주년 기념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행사장은 올해도 날씨 걱정이 없는 COEX 전시장으로 정하고, 9월 14일(일) 당일‘한일축제한마당’에 앞서 전날인 13일(토)에‘한일축제한마당 in Seoul 10주년 기념 공연’이라고 칭한 전야제를 거행하기로 했습니다.

【전야제】
COEX ・ Auditorium 행사장은 1000여명의 관객으로 가득 찼습니다.
제 1부는‘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한국 전통무용가 김리혜씨가 세월호 참사의 진혼(鎮魂)을 해원상생(解怨相生)의 마음으로 엄숙하게 추어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 2부는‘우정 빛 미래로 한일을 이어 미래를 뽑는 피아노 선율'이라는 제목으로 NHK 대하 드라마‘아쓰히메(篤姫)’(2008), ‘고우(江)~ 공주들의 전국’(2011)의 작곡가로 각광 받고 있고, 영화‘냉정과 열정 사이'의 사운드 트랙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피아니스트 요시마타 료(吉俣良)씨, 그리고 드라마 '겨울 연가'의'When the love falls '를 작곡한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 젊은 피아니스트 YIRUMA씨가 각각 솔로 공연 후, 두 사람이 협연하여 한일우정을 연주했습니다. 요시마타 료(吉俣良)씨의 반주자인 마나베 유우(真部裕)씨의 멋진 바이올린 음색은 물론, 보고 듣는 모든 것 자체에 한껏 매료 된 2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전야제 당일에는 삼성동 교차로 인근 G20 광장에서 야외공연이 펼쳐졌습니다. 공연(1)에서는'약동', '고야(胡屋)에이사’,’치어리딩’,’간토(竿燈)마쓰리’가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공연(2)에서는‘기쿠노카이(菊の会)’, '하나 코리아', '아오모리 네부타(青森ねぶた), 그리고 ‘아키타 간토(秋田竿燈)'가 서울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며 관객은 물론 행인들에게도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한일축제한마당 ~ 축제 10 년, 꿈을 싣고 ~]

개회식에 앞서 10주년 축하 공연에서는 세종시대에 음악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난계(蘭渓) 선생 후예로 구성된 '영동난계국악단'과 풍류 피아니스트이며 신명나는 소리를 만드는 천재 작곡가 ‘임동창’씨의 연주로 화려하게 막을 열었습니다. 또한 ‘기쿠노카이(菊の会)’의 화려한 일본 무용이 선보여졌으며 ‘B.W.B'와 'Khan & Moon'의 락킹댄스와 미디어 퍼포먼스가 오프닝 무대로 꾸며졌습니다.

제 1부 '공식 행사’ : 10년의 발자취’로 개회식 행사 종료 후 10 주년 기념 특별 공연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리쿠젠타카타시(陸前高田市)의 ‘히가미교메이카이 히가미다이코(氷上共鳴会氷上太鼓)’의 합동 공연이 이루어져 개회식 전체 분위기에 흥을 더해주었습니다.

제 2부 '공연 행사’: 함께 즐기는 문화'에서는 한일을 대표하는 축제가 연이어 힘찬 퍼포먼스를펼쳐 주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쿠시마(徳島)의 귀중한 전통문화 '아와 오도리(阿波踊り),'오키나와시(沖縄市)고야 청년회(胡屋青年会)의‘고야 에이사’, ‘일본 춤의 전통을 지켜온‘기쿠노카이(菊の会)’, 이름 그대로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약동하는 요사코이팀 '약동', 일본 전국대회 14회 연속 우승에 빛나는 '치어리딩부'가 흥을 돋구어 주었고, 한국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안동하회별신굿탈놀이’, 원초적인 에너지와 재미를 넘어 아름다운 감동을 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부라스 스카 밴드 'No.1 Korea "가 출연했습니다. 또한 마지막 한일 공동 출연인‘셰프 콘서트'에서는 기상천외한 요리대결로 스시, 피자, 누들, 비빔밥 등을 만드는 개성 넘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제 3부 '마당 놀이’: 함께 나누는 우정'에서는 특별 게스트로 피아니스트 ‘요시마타 료(吉俣良)씨와 여배우 우에노 주리(上野樹里)씨가 출연했습니다. 우에노 주리씨는 2011년 NHK 대하 드라마‘고우(江)~ 공주들의 전국~’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현재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며, 한국에서도‘노다메 칸타빌레 최종 악장'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어지는‘J-POP' 공연에서는 전세계 팬들로부터 사랑 받는 싱어송라이터 ‘Mayu Wakisaka’와 일본문화의 즐거움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는’YANAKIKU’, 그리고'K-POP' 공연으로는 '겨울연가'로 유명해져 NHK‘홍백가합전’에 출연한 싱어송라이터‘Ryu’와 한중일 3 개국, 6개 GENE(유전자)로 구성된 아시아 글로벌 유닛 ’CROSS GENE’가 멋진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클라이막스는 일본을 대표하는 축제 중 하나인‘아오모리 네부타(青森ねぶた)’가 피리와 북을 연주하는 하야시와 하네토, 네부타 수레와 함께 삼박자 갖추어져 열띤 공연을 펼쳤으며 계속해서’아키타 간토(秋田竿燈)'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50 킬로미터가 넘는 간토(장대)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사시테(差し手)’의 다이나믹한 기예가 관중을 잇달아 매료 시켰습니다. 그 다음으로 밤새도록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한국전통의 '진도 강강술래' 공연이 펼쳐지고 이어서 활기찬 일렉트릭 사물놀이의 연주에 맞춰 한일합동공연으로 '요사코이 아리랑'무대가 펼쳐졌습니다. 피날레는 예년처럼 한일 출연자들과 관객이 일체가 되어, 행사장 가득히 비빔밥 상태가 되어‘한일축제한마당’의 교류의 원(和)이 만들어졌습니다. 교류의 환희는 회장 가득 울려 퍼졌으며, 양국의 남녀 노소가 마치 벚꽃과 무궁화 꽃이 앞다투어 피듯 춤을 이어갔습니다.

● 한일축제한마당의 평가 및 반성
・올해‘한일축제한마당’은 젊은 남녀를 중심으로 작년을 웃도는 5만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축제’는 정치,외교 문제와는 별개라는 점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당초, 역경에 처하며 지원금모금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 예상되어 전야제 중지를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작년을 상회하는 지원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지원해 주신 기업과 개 인 여러분께는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올해 '한일축제한마당'의 큰 이슈는 뭐라고 해도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참석입니다. 물론, 벳쇼 코로(別所浩郎) 주한 일본대사의 노고에 의한 힘이었지만, 정치, 외교를 떠나 '한일축제한마당'에 참석해 주신 의의는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내년에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으로 기념할만한 해입니다. 우리‘한일축제한마당’이 터널안에 있는 정치,외교상에서의 한일 불협화음을 해결하는 계기가 된다면 실로 양국간‘한일 우호의 상징'이라는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일축제한마당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사람, 물건, 자금’이라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각각에 대해 언급해 보겠습니다.

‘사람’= ‘Manpower’
・한일축제한마당의 실질적인 주최자 '실행위원회’에는 강신호 실행위원장을 비롯해 20명의 각계 대표들이 실행위원(올해 신규회원 3명 추가)이 되어, 협찬모금 및 건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운영위원회’위원으로 자원봉사자 36명(한국인 22명, 일본인 12명)이 모여,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운영위원장 선임은 매년 고심거리로 후계자 육성은 여전한 과제입니다.
・한일축제한마당 자원봉사자는 1,200명이 응모했으며, 최종적으로 673명의 젊은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해 주었습니다.
・축제 당일은 아침 일찍부터 젊은층을 중심으로 행사장이 가득했으며, 작년을 상회하는 5만명의 관객이 축제를 즐겼습니다. ‘한일축제한마당’이라는 문화교류는 오늘날의 정세불안과는 상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물건’= ‘협찬품','노하우'
・‘협찬품'으로 출연단체 항공권, 티셔츠, 행사장 추첨상품, 자원봉사나 친목회장에서 과자, 만두와 음료수 등을 제공하여 축제운영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자금’= ‘Finance’
・한일 양국의 기업으로부터 받은 협찬금은 바로 한일축제한마당의 주축입니다.
・올해는 정치•외교문제, 세월호 참사 등으로 협찬모금에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작년을 상회하는 협찬금이 모였습니다.
・한일 기업의 협찬 비율은 작년부터 거의 5:5 비율이 되었습니다.
・협찬 모금은 개인의 힘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향후 자발적인 지원이 진행될 수 있도록 축제의 매력구축과 계획이 필요합니다.
・당초, 전야제 티켓을 유료로 판매하여 그 수익금을 '한일축제한마당'의 지원금으로 활용할 계획 이었지만, PR 기간이 짧아 유감스럽게도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습니다.
・지금까지 축적된 축제를 추진하는‘노하우’는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이를 차세대에 어떻게 계승하느냐가 즐거움이자 큰 과제이기도 합니다.

● 내년 이후의 한일축제한마당
・앞에서도 언급했듯이‘한일축제한마당’같은 문화교류는 정치•외교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0 주년’이라는 기념할 만한 해입니다.
・10년 전인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小泉) 총리 두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한일 우정의 해 2005’라는 명칭으로 개최 1년 전부터 양국에서 700여건(그 중 하나가 ‘한일축제한마당’)의 기념행사가 계획되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는 50주년을 향한 준비가 무엇 하나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한일축제한마당’입니다. 따라서 이 '축제'를 중심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국간에 어떤 악재가 있더라도 항상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는 등대의 불빛처럼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한일축제한마당’이 있습니다.

‘한일축제한마당’에 지원, 협력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여러분의 지속적인 이해와 도움을 부탁 드립니다.


2015 년 : 제 11 회 '한일축제한마당'

● 올해 한일축제한마당의 자리 매김과 준비
201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만, 양국 정상 회담도 잘 이루어 지지 않고 한일 관계는 정치, 외교 면에서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700건 이상의 교류 행사가 준비되었던 10년 전 40주년 기념 때와 비교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10년의 역사와 실적을 가진 ‘한일축제한마당’을‘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최대 주요행사로 하기 위해 멈버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 올해 한일축제한마당의 운영과 프로그램
‘한일축제한마당’의 기본이념인‘불역유행(不易流行)'과 '역지사지(易地思之)’정신을 바탕으로‘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즉, 지방자치단체 교류, 청소년 교류, 음식, 의복, 놀이 도구 등 각종 문화 교류를 다수 포함시켰습니다. 40주년 기념 심벌마크와 슬로건을 참고로 양국 정부의 공식 슬로건 '함께 열어요 새로운 미래를’을 ‘한일축제한마당’의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하여 9월 19일(토) 신촌 연세로 퍼레이드, 20일(일)은 COEX전시장에서 이틀간에 걸쳐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9월 19일(토) 신촌 연세로 무대공연과 퍼레이드
첫날 무대공연 퍼레이드는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신촌 연세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조선통신사 행렬입니다. 조선통신사는 무로마치(室町)시대부터 에도(江戸)시대까지 조선왕조가 일본에 보낸 외교사절단으로서, 특히 이 시기는 한일간에 분쟁이 없는 평온한 260여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여기에 흐르는 정신은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설파한 '성신 교린(誠信交隣)'입니다. 즉, ‘서로 속이지 않고, 진심으로 교류한다’는 실로 국제외교의 기본방침이라고 할만한 정신입니다. 오늘날 양국의 정치•외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꼭 이 정신을 이해하기 바라며 기획한 것입니다. 수 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란색 한복의 자원 봉사자 100 여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는 위풍당당하게 행진했습니다. 그 뒤를 한일 민간 단체가 이어지며 독자적인 퍼포먼스를 펼쳤습니다. 마지막은 SJC의 도쿄에서 달려 온 OB멤버도 가세한 가운데 이루어진 '요사코이 아리랑'이었습니다.



9월 20일(일) COEX 전시장 공연
제 1부 '공식 행사'는 서울 일본인학교와 서울시 소년소녀합창단의‘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축하 공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천진난만한 한일 양국, 소년소녀의 노래와 춤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다나카 마사시(田中将志)운영위원장의 개회선언에 이어 강신호 명예실행위원장, 박삼구 실행위원장(금호 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인사말과 윤병세 외교부장관, 벳쇼 코로(別所浩郎) 주한일본대사의 축사 등에 이어, 50주년 특별공연으로 'Hidano Super Taiko Group & 아마도 이자람 밴드’가 화려하게 한일 합동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제 2부 '함께 열어요’에서는 계획된 지방자치단체 교류,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이 펼쳐졌습니다. 청소년 교류로 일본에서는 히노(日野)고등학교의‘고진가구라(荒神神楽)’, 일본항공(航空)고등학교의‘다이코(太鼓)’, 바이카여자대학(梅花女子)의‘치어리딩’공연이 이루어졌고, 한국에서는 '상명한오름무용단', '와이즈 발레단', '드럼 라인 RIM’의 젊음이 넘치는 연기가 펼쳐졌습니다. 지방자치단체교류로 일본에서는 시모노세키(下関)의 귀중한 전통문화인‘시모노세키 헤이케오도리(下関平家踊り)’, 오키나와시(沖縄市)데루야(照屋) 청년회에 전해지는‘데루야 에이사’, 아라타류 호세이카이 (荒田流宝声会)의‘쓰가루데오도리(津軽手踊り), 이름그대로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약동하는 요사코이팀 '약동(躍動)', '사쿠라유키(桜雪)Ma-u', '모미지렌(紅葉連)', 그리고 한국에서는 제주 특별자치도립무용단이 '전통무용'으로 강력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마지막으로 한일합동공연으로 '하나 코리아'가 사이좋게 춤을 추었습니다.



제 3부 '새로운 미래를’에서는‘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특별 공연으로 'J-POP, K-POP 스페셜 콘서트'를 개최하여 일본의 사시다 후미야(指田郁也), 한국의 Epik High를 초대했습니다. 당대 인기있는 양국 특별 게스트의 출연으로 행사장은 젊은이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압권은 피날레 공연 <함께 여는 새로운 미래를>이었습니다.
김덕수씨의 연출에 의해 소카(創価)르네상스 방가드의 호화롭고 화려한 밴드 공연으로 행사장은 단숨에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으며 ‘강강술래’, 한울림의 ‘연희단춤’ SJC 멤버에 의한 '요사코이 아리랑'과 함께 일렉트릭 사물놀이로 사실상 비빔 상태가 되어, 행사장은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교류의 환희는 행사장 가득 울려 퍼졌으며, 양국의 남녀 노소가 마치 벚꽃과 무궁화가 앞다투어 피듯 춤의 향연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장내 부스에서는 각 지역의 특산물, 음식, 전통문화, 의복, 놀이 등이 전시되었고, 체험코너를 포함해서 모든 부스가 활기에 넘쳤습니다. 특히 올해 개설한 음식코너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 한일축제한마당의 평가 및 반성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기념으로 이루어진 올해 '한일축제한마당'은 젊은 남녀를 중심으로 예상을 뛰어 넘어 약 9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축제’는 정치,외교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이러한 성공의 열쇠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기념으로써의 자리매김을 멤버 전원이 이해하고 지방자치단체 교류, 청소년 교류, 음식, 의복, 놀이도구 등 각종 문화 교류를 다수 포함하는 계획을 세우고 이것이 확실하게 실행 된 것입니다. 게다가 날씨 또한 축복이었습니다.
・COEX 행사장에서 음식을 허용하는 조례가 시행된 것도 작년을 상회하는 관객수 동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역시 ‘축제’에는 음식이 있어야 분위기가 삽니다.
・ 또한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도 작년을 웃도는 협찬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원해준 기업과 개인의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 작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한일축제한마당' 참석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지만, 올해는 공식적으로 참석하여 축사도 해주셨습니다. 한일 우호친선에 큰 진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내년 이후의 한일축제한마당
・‘한일축제한마당’은 단순한 문화 교류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교류, 청소년 교류, 음식, 놀이 등, 각종 문화 교류를 포함하는 복합 문화교류입니다.
・ 양국 국민이 서로의 문화와 역사, 생활풍습 등을 이해하는 장소입니다.
・ 정치•외교 문제와는 거리가 먼 행사이지만, 양국간에 오랫동안 감도는 정치•외교 문제에 실마리가 되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 양국간에는 어떤 악재가 있어도 항상 나아갈 바를 알려주는 등대처럼 '한일우호의상징'으로서 한일축제한마당이 있습니다.
・ 많은 젊은이들에게 ‘한일축제한마당’의 의미를 전승하고 계승해 가고자 합니다.


2016 년 : 제 12 회 '한일축제한마당'

● 올해 '한일축제한마당'의 목적
지난해'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거쳐, 새로운 한일의 미래를 구축하는 첫걸음이 되는 해로서 ‘도쿄의 한일축제한마당’과 합의 후, '함께 만들자 새로운 50 년'을 테마로 내걸고, 양국의 차세대를 짊어질 젊은이가 중심이 되는‘한일축제한마당’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또한 ‘축제’의 얼굴인 포스터도 젊은이들의 의견과 제안을 존중해서 일신했습니다.

● 올해 ‘한일축제한마당’ 운영 및 프로그램
지금까지의 반성을 바탕으로 다음 3가지 점을 고려하여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1) 다양한 장르의 공연 및 퍼포먼스 연출
(2) 공연의 양보다 질을 고려
(3)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감안한 프로그램에 대한 배려
또한‘한일광장’설치와 거리 공연뿐만 아니라 양국 젊은이들의 교류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교류의 장'도 마련했습니다. 단순한‘축제’퍼포먼스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교류, 청소년교류, 음식물, 의복, 놀이도구 등 각종 문화 교류를 다수 포함 시켰습니다.

● 10월 2일(일) COEX 전시장 공연
당일 행사장에는 일찍부터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10시 30분 개장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오프닝 공연은 ① 한일 커버댄스공연(로자리오 + 크로스,아이시어)과 ②일본 전통무용 공연인 ’기쿠노카이’로 시작했습니다.

제 1부 '공식 행사'
서울일본인학교와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의 합동공연으로 시작했습니다. 한일양국, 소년소녀의 청아한 목소리는 행사장을 가득 메운 관중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었습니다.
박삼구 한국측 실행위원장(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사사키 미키오(佐々木幹夫) 일본측 실행위원장(미쓰비시상사 특별고문)의 인사와 개회선언이 큰 소리로 이루어졌습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축사, 새로 부임한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일본대사와 내빈 축사 후 특별공연으로 사도•‘고도(kodo)’의 와다이코와 ‘김덕수패 사물놀이단’의 합동공연이 힘차게 펼쳐졌습니다."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과 서울일본인학교의 합동공연
김덕수패 사물놀이「공연과 고도(kodo)합동공연


제 2부 ‘즐거운 축제'
일본에서는 ① 올해 5번째로 출연하는'약동'의 다이내믹한 퍼포먼스 ② 수준 높은 다양한 일본전통 무용을 선보이는‘기쿠노카이'의 아와오도리와 시시마이 ③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요시다 형제’의 빠른 템포의 쓰가루 샤미센 연주 ④ 아오모리현(青森県)에서 예로부터‘화재예방’을 한다고 전해지는‘사비시로 도라마이’의 유머러스한 춤 ⑤ 일본 아티스트로서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 콘서트에 출연한 '고도’의 강력한 와다이코 연주가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한국에서는 ① 한국의 전통 문화를 빛나는 가면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표현하는'광탈’의 탈춤 ② 한국의 토속적 종교의식인 '굿’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천지인의 기원’을‘상명 한오름무용단’이 우아한 춤으로 선보이며 ‘즐거운 축제’의 자리를 더욱 흥겹게 해주었습니다.

제 3부 ‘즐거운 만남’
일본에서는 ① 차세대를 이어갈 90년대에 태어난 KRUMP•BREAK•HIPHOP•HOUSE(춤의 종류)의 실력파 톱 댄서로 구성된 ‘The90sJPN’의 댄스 공연 ②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코스플레이어’ ③ 오래 전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쿠리코더 콰르테트’와 일본 인디즈 밴드 ‘뷰티플 허밍버드’의 공연, 그리고 한국에서는 ① 올바른 품세를 바탕으로 작품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Legend Movement’에 의한 강력한 태권도 퍼포먼스 ② 트렌디 한 록, 팝, 펑크, R & B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사운드로 관객을 순식간에 사로잡은‘Reflex’의 압도적인 록 퍼포먼스에 젊은이들은 흥분 했습니다.

특히 ②의‘코스플레이어’는 젊은이들에게 예상외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코스프레는 영어 “costume play”에서 따왔는데, 한국에서는 공연 전례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코스프레는 코스플레이어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는 것 자체만으로도 공연이 되기도 하고, 관객도 즐길 수 있는 요즘 젊은이 취향의 퍼포먼스입니다. 이번 축제에서는 일본에서 5명, 한국에서 3 명의 코스플레이어가 무대에 올라 자기 PR을 하며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유행할지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인기가 많았던‘코스플레이어’
스페셜 콘서트‘아마쓰키(天月)’
           
제 4부 ‘즐기는 우리’
특별공연‘아마쓰키(天月)/J-POP’스페셜 콘서트는 놀라울 정도로 행사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 시켰습니다. 아마쓰키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를 계기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가창력은 물론 그 자신의 세계관 자체로 높은 지지를 받는 보컬리스트입니다.
SNS를 통해서 알게 된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보고자 행사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마쓰키가 무대에 오르자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젊은 관중들은 환호하며 호 호응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신비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이어진‘April / K-POP’스페셜 콘서트도 사랑스럽고 즐거웠지만, 아마쓰키의 강렬함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피날레 공연 오프닝으로 ① SJC를 중심으로 한 '요사코이 아리랑' ②‘약동’의 힘찬 무대 후
③ 신라시대 유리왕 시절부터 유래 한 풍습으로, 공동작업을 통해 서로의 협력과 조화를 나타내는 민속놀이 ‘가배(길쌈)놀이’가 엄숙하게 펼쳐졌으며 ④ 사물놀이의 대가인 김덕수씨의 선창이 행사장 전체로 울려 퍼지며 피날레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약동'의 깃발이 크게 휘날리는 가운데 양국 남녀 노소의 '요사코이 아리랑', '사물놀이 한울림예술단'의 춤이 행사장 가득히 펼쳐지며, 올해도 역시 비빔밥과 같은 상태가 되어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었습니다. 교류의 환희는 행사장 가득히 울려 퍼지며, 마치 벚꽃과 무궁화가 앞다퉈 피어나듯이 춤의 향연을 펼쳤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된 흥겨운 행사장
벚꽃과 무궁화가 앞다퉈 피어나듯이 춤추는 한일축제한마당 관계자


‘한일 광장'과 '교류의 장'
또한 행사장에 설치한 '한일 광장’에서는 다양한 스트리트 퍼포먼스가 이루어졌으며, 그때마다 큰 환호성이 이어졌습니다. 젊은이들의 교류를 돈독히 하는‘교류의 장’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각각 한복과 기모노를 번갈아 입고 사진을 찍으며 새로운 만남을 즐겼습니다.
단순히 ‘축제’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기업 전시회를 포함한 지자체 교류, 청소년 교류, 음식, 의복, 놀이도구 등의 각종 문화 교류가 폭넓게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행사장 부스에서는 각 지역의 특산물, 음식, 전통문화, 의복, 놀이 등이 전시되었으며 체험 코너는 모든 부스에서 활기를 띄었습니다. 특히, 올해 음식코너에서는‘라면’과 ‘카레’그리고 레타스의 ‘샤브샤브'등 새로운 메뉴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한일광장’에서 펼쳐진 스트리트 퍼포먼스
젊은이로 붐비는‘교류의 장’


● 한일축제한마당의 평가와 반성
올해 ‘한일축제한마당’은 젊은이를 중심으로 지난해를 상회하는 약 6만 명의 관람객이 모였습니다. 재작년에는 윤병세 외교부장관이 비공식적으로 행사장을 찾아 벳쇼코로(別所浩郎) 전 주한일본대사와 첫 대면을 했습니다. 지난해는 공식적으로 참석하여 축사까지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정치•외교적 분위기도 좋아지고, 그 이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듯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래봤자 축제, 그래도 축제’ 라고 하지만, ‘한일축제한마당’이 한일양국의 우호친선 증진에 기여하고 있음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올해 '한일축제한마당'의 주요 성공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당초 의도했듯이 ① 다양한 장르의 공연 및 퍼포먼스의 연출 ② 공연의 양보다 질, 그리고 ③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감안한 프로그램에 대한 배려가 실행된 점
(2) ‘한일축제한마당’이 현재, 필수SNS 등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
(3) 새롭게 마련한 '한일광장'에서 다양한 거리 퍼포먼스를 펼치며,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의 새로운 만남의 장인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
(4) 지방자치단체교류, 청소년 교류 이외에, 음식, 의복, 놀이 등의 각종 문화체험 코너에 연구를 거듭 한 점
(5) 음식코너에는 ‘라면’이나 ‘카레’, ‘샤브샤브 레타스’등의 새로운 메뉴를 넣은 것 등.
역시 ‘축제’에는 음식이 있어야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또한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 한일축제한마당의 의의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신 기업과 개인이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한일축제한마당’의 사무국체제가 견고하지 않아, 협찬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무국 조직의 확립이 과제입니다.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축제’현장에서 새로운 공연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한일축제한마당’은 궁극적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교류를 바라고 있습니다.
머리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상대를 느끼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문화란 물처럼 흐르고, 물처럼 뒤섞인다’라는 말 그 자체입니다.

● 내년 이후의 한일축제한마당
・‘한일축제한마당’은 단순한 문화교류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교류, 청소년 교류, 음식, 놀이 등, 각종 문화 교류를 포함한 ‘복합 문화 교류’입니다.
・ 양국 국민이 서로의 문화와 역사, 생활풍습 등을 이해하는 장소입니다.
・ 정치•외교와는 거리가 먼 행사지만, 양국간에 오랫동안 이어지는 정치•외교 문제에 실마리가 되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 양국간에 어떤 악재가 있어도 언제나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처럼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서 ‘한일축제한마당’이 있습니다.
・올해에 이어 많은 젊은이들에게‘한일축제한마당’의 의미를 전승하고 계승해 가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한일축제한마당’에 지원, 협력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이해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7. '한일축제한마당'의 테마와 슬로건
테마와 슬로건은 그 해 '한일축제한마당'의 스토리를 나타내는 얼굴, 즉 타이틀입니다.
이하 지금까지의 연도별 테마와 슬로건을 정한 배경과 프로세스를 설명하겠습니다.

● 2005년 테마와 슬로건
200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기념 행사 전체 슬로건은 “나아가자 미래로, 함께 세계로” 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한일축제한마당'은 이웃 나라로서 오랜 역사를 공유한 한일 양국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이콜(equal•동등한) 파트너’로서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슷하지만 다르다, 다르지만 비슷하다”가 '한일축제한마당'의 테마로 정해졌습니다.
2005년은 관이 주도하고 민간이 지원하는 체제였습니다.

● 2006년 테마와 슬로건
2006년은 SJC 회원을 중심으로 열의 있는 자원 봉사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한일축제한마당’으로 이어가기를 바랐지만 아직 체제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일본 대사관(외무성)의 주도로 기획과 준비는 일본측 사무국(여행사)에 의뢰, SJC는 기금모금 등을 포함하여 ‘한일축제한마당’을 지원하는 체제로 실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한일 시민 및 자치단체에 의한 축제” 가 테마가 되었습니다.

● 2007년 테마와 슬로건
2007년에 처음으로 SJC 회원을 중심으로 열의 있는 자원 봉사자가 '한일축제한마당’을 주도하면서 일본 대사관(외무성)의 후방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추어 자원 봉사자인 까닭에 우리의 신념대로‘한일축제한마당’을 만들어 가자는 것으로, 한일 양국의 콜라보레이션, 즉 "비빔 상태를 만드는 ‘한일축제한마당’을 상정하고 조선통신사 400주년 기념행사도 계획했습니다.
테마를 “함께 만드는 우정의 바퀴” 슬로건은 "보고 만지고 이야기하자"로 결정했습니다.

● 2008년 테마와 슬로건
2008년은 한일 양국이 미래 지향적인 관계로 한 발 내디딘 ‘98년 공동선언'으로부터 꼭 10년이 되는 해였지만, 독도와 교과서 문제,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 등으로 이명박대통령에 대한 반발 시위도 있고, 시청앞 광장이 7월 가까이 점거되어 개최 여부가 불투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야말로 개최 해야 한다는 자원봉사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이해하고 조화를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테마는 "각양각색의 한국, 각양각색의 일본"으로 했습니다.

● 2009년 테마와 슬로건
2009년은 도쿄와 서울에서 동시 개최라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되어 도쿄와 서울에서 보조를 맞춰 테마를 "함께하는 서울- 도쿄! 함께 가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 2010년 테마와 슬로건
2010년은‘한일 합방 10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예로부터 두 나라 사이에는 다양한 교류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졌습니다.
미야자키현(宮崎県) 난고(南郷)지방에서 1300년간 지속된 ‘시와스 마쓰리’를 초빙하고 테마는 “오랜 역사와 밝은 미래”로, 슬로건은 “우리는 通한다 -통하는 우리, 통하는 마음, 통하는 미래”라고 정했습니다.

● 2011년 테마와 슬로건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한때는 한일축제한마당 중지도 검토되었지만,“규모는 작더라도 해야 한다”는 모두의 의견을 모아 축제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테마는 당초“고마워요 한국! 힘내라 일본!"이었지만, 마지막은 “고마워요 한국! 힘내자 일본! " 으로 정했습니다.
슬로건은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입니다.

● 2012년 테마와 슬로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회복한 일본을 어필하는 마음에서 "희망찬 한국 활기찬 일본" 으로 했습니다.
슬로건은 지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를 사용했습니다.

● 2013년 테마와 슬로건
2013년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권이, 일본에서는 아베(安倍)정권이 탄생하면서 새로운 싹이 기대됩니다.
그래서 테마를 "움트는 희망,미래로”라고 했습니다.
슬로건은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입니다.

● 2014년 테마와 슬로건
박근혜 대통령, 아베(安部) 총리의 정상 회담도 여의치 않아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한국인을 비탄 속에 빠트렸을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0주년 기념 축제에 주변 환경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10회째 이어온 축제에 꿈을 부풀려 테마를 "축제 10 년, 꿈을 싣고" 로 했습니다.
슬로건은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 입니다.

● 2015년 테마와 슬로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의 해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상 회담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한일 관계는 정치∙외교면에서 여전히 불투명 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700건 이상의 교류 행사가 준비되어 있던 10년 전, 40주년 기념 때와 비교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즉, 지방자치단체 교류, 청소년 교류, 음식, 의복, 놀이도구 등 각종 문화 교류를 다수 포함 시켰습니다.
40주년 기념시의 심벌 마크와 슬로건을 참고로 양국 정부의 공식 슬로건 '함께 열어요 새로운 미래를’ ‘한일축제한마당’의 테마로 채택했습니다.
슬로건은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입니다.

● 2016년 테마와 슬로건
지난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거쳐 새로운 한일의 미래를 구축하는 첫 걸음의 해로 "도쿄의 한일축제한마당"과 협의 후 '함께 만들자 새로운 50년'을 테마로 내걸어 양국의 차세대를 짊어 질 젊은이를 중심에 두는 ‘한일축제한마당’으로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슬로건은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입니다.

● 2017년 테마와 슬로건
테마는 “함께 나아가자 한마음으로" , 슬로건은 “즐거운 축제, 즐거운 만남, 즐기는 우리”입니다.

<참고>
'한일축제한마당'에 나라현(奈良県) 주목 하는 것에 대한 취지

축제 관련 책은 한국과 일본 축제의 원류(源流)와 현재를 모색한 것입니다. 원류(源流)에 관해서는 한일 양국이 언어적•민족적으로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관점에서 한반도, 일본열도, 옛 만주를 뛰어 넘어 멀리 몽골에까지 이르는 문화의 맥류(脈流)를 잡으면서, 한일간의 축제 문화가 큰 축으로 나타나는 듯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축제를 유목(사냥)민족 문화로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한편, 김용운 선생은 중국 대륙에서 들어온 ‘농경민족문화’라는 측면도 축제가 출연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한일 축제라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북방계 유목 문화와 남방계의 농경 문화가 뒤섞인 것이고 그것이 일본 열도에 건너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 축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일 문화를 더듬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유목과 농경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 부근에서 하나가 되어 그것이 남하하여 바다를 건넜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문화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수렵•유목과 농경이 하나의 문화 트렌드를 공유하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국의 문화는 형제다”라는 표현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6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이러한 조류(潮流)가 세련되어졌으며 일본에서는 야마토(大和) 조정 부터 헤이조쿄(平城京)가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중반까지 입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도 6세기초 이므로 불교가 큰 도화선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한일 문화의 공통성을 보는 데 있어서 흥미로운 점은 한일 두 지역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 큰 요인이 바로 백제 멸망입니다.
백제와 야마토(和朝)조정은 친척관계에 있었다고 할 정도로 깊은 관계가 있었지만, 660년에 멸망합니다. 그 후 백제 재흥(再興)을 시도한 백촌강(白村江)전투는 야마토(和朝) 조정에서 약 2만 7 천명의 군대가 백제의 지원군으로 보내집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수가 압도적으로 적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배합니다.
백제에 지원군을 보낸 야마토(和朝) 조정의 중심 인물은 후에 덴지천황(天智天皇)이 되는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입니다.
이 싸움의 패배로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는 국가 조직을 더욱 견고히 하고 천황의 자리에 대해서도 그 노력을 계속합니다. 이렇게 하여 왜(倭)가 율령제를 도입하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탄생하여 710년, 나라(奈良)에 도읍을 둔 것입니다.

한편,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는 660년부터 710년 사이의 50년간 전후(戦後)처리에 분주합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신라와 왜(일본)라는 단순한 관계가 아닌 당나라가 있고, 북쪽으로는 백제와 우호 관계에 있던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하고 왕가의 유민이 만든 발해가 있었습니다.
야마토(和朝) 조정은 이들 국가와 외교를 수행해갑니다. 즉, 고대 한일관계는 이러한 복잡한 동아시아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 내년의 '축제'에 나라현(奈良県)이 부스에 꼭 참가해 주기를 바라는 이유는 물론, 충청남도와 자매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백제와의 인연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저는 660 년 이후의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전통 문화라고 불리는 것의 큰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은 통일 신라입니다.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각국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지만, 그 중심은 원래 신라에 있습니다. 660년 이후의 나라현(奈良県)에 주목하면 한국과 일본을 이을 때 한국에는 서울-충청도-경상도의 큰 삼각형이 생깁니다. 거기에, 강강술래(전라도)가 들어옵니다. 나머지는 내년 축제에 강원도에서 뭔가 넣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은 내년까지 숙제로 두고 어느 쪽으로도 한국을 하나로 묶는 구도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일축제한마당’ 행사는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에 주목해 보면, 나라(奈良)의 문화는 일본 전국에 침투되어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아이누계(홋카이도(北海道)에만 국한되지 않고, 관동 부근까지 들어가 있던 아이누계 문화를 말한다)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중심(중앙)과 주변의 문제가 나옵니다. 다만 그것은 ‘수렵•유목+농경'이라는 모델로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이 국풍(国風)문화를 형성함에 있어서 한반도에서 유목과 농경의 두 문화가 합류하여 일체화되어 갔다는 것이 역시 일본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660년 이후 야마토(大和) 조정과 헤이조쿄(平城京)의 궁정이 매우 교묘하게 행한 것입니다. 중국 율령제를 도입한 중앙은 농경 주체이면서 주변 지역의 수렵▪유목 문화를 잘 흡수하여 이를 통해 율령제가 지방으로 흘러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년 ‘한일축제한마당’에서 일본의 것을 소개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금 난해한 감이 있었습니다만,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1. 660년 이후, 한국과 일본은 긴밀한 국제적 관계를 구축했다는 역사가 있다.
2. ‘수렵•유목 + 농경’의 모델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와 그 변천과정을 바라볼 수 있다.